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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과 희망

천민경 | 2018-11-06 |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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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결혼이민자한국어교육사업에 참여 중인 유소희씨가 직접 작성한 수기입니다. 


나의 꿈과 희망


 안녕하세요? 저는 베트남에서 온 유소희라고 합니다. 10년 전에 결혼업체를 통해 남편을 만나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21살에 한국이라는 나라의 땅을 밟았습니다. 꿈과 희망을 가지고 한국에 왔습니다.

 

꿈과 희망을 안고 

  한국 속담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세월이 벌써 많이 흘러 버렸습니다. 시댁은 부산이지만, 강동동이라는 시골동네였습니다. 마을버스가 1시간에 한 대씩 지나갔습니다. 버스를 놓치면 1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음식, 언어, 문화,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고부갈등까지 많이 힘들었지만, 남편만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해쳐나갔습니다. 첫째를 낳고 1년 뒤 둘째도 생겼습니다. 딸들이 생기고 나서 아이들 교육문제로 고부갈등이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저는 애들을 시골에서 키우는 것이 너무 불편하다는 핑계로 분가하자고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남편은 동의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챙겨주신 이불 한 채를 들고, 사상구 삼락동에서 자립을 시작했습니다. 낡은 집에서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10만 원에 살았습니다. 겨울은 많이 춥고 여름이 되면 많이 더웠습니다. 분유, 기저귀, 월세, 전기, 수돗물, 가스 등 고정으로 지출되는 생활비 때문에 매달 남편이 갖다 주는 생활비가 빠듯했습니다.

 

잃어버린 소리, 막막한 일상

  그 와중에 감기를 달고 살았던 막내딸이 이상한 증세를 보였습니다. 돌이 지났는데도 말을 하지 못하고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저는 원인을 알고 싶어서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서 청력검사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청력검사를 통해 딸의 청각장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와 남편은 충격을 받아서 말을 잃었습니다. 사실 남편은 형제가 32녀인데, 그 중에 3분이 모두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편은 정상인데 딸이 청각장애라니,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딸만 보면 미안함과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평생 딸한테 엄마라는 소리도 못 듣고 살아야 되나, 앞길이 너무 막막했습니다. 한국으로 올 때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왔는데, 제 삶은 왜 이렇게 힘들까 싶었습니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남편과 의논해서 다시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여러 검사를 한 결과 딸에게 작은 희망이 생겼습니다.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인공와우라는 수술이 개발이 되고 있었습니다. 딸의 머리 속에 인공 달팽이를 만들고 머리 밖에는 자석기계 자극을 이용해서 소리를 내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수술비용도 만만치 않고 시간과 노력도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수술비는 2천만 원을 넘었는데, 최근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어 본인 부담금은 6백만 원 정도 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수술비용도 비용이지만 아이가 평생 기계를 머리에 끼고 살아야 되고, 혹시 아이가 성장하면서 기계를 끼는 것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지거나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 봐야 된다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수술을 하겠다고 했고, 5개월 뒤에 오른쪽 귀 수술을 예약하고 집에 왔습니다. 채은이를 수술시키겠다는 소식을 듣고 막내 시누이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수술하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차라리 수화를 배우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문자였습니다. 저는 작은 희망이라고 놓치고 싶지 않아, 돈은 제가 벌면 된다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저는 딸의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한참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딸들을 어린이집에 보냈습니다. 저는 집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10분 거리에 있는 신발공장에 취직했습니다. 밤낮 없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저축했습니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도 아프다 

  드디어 수술 날이 다가왔습니다. 하루 전에 금식하느라 배고프다고 밥만 찾는 딸이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오전 1030분에 저는 딸을 안고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 “채은아, 수술 잘하고 나와. 엄마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라고 말을 했지만, 딸은 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회사 일 때문에 병원에 오지 못했습니다. 저 혼자 수술실 밖에서 딸을 기다렸습니다. 수술은 3시간이 걸렸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3시간이었지만, 저에게는 엄청 길게 느껴졌습니다. 많은 생각들과 두려움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제발 수술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리고 강채은 보호자 분이라며 큰 목소리로 저를 찾던 간호사님의 목소리가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습니다. 저는 딸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회복실에서 딸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울고 있었습니다. 딸의 그런 모습을 저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딸이 입고 있던 수술복에는 아직 핏자국이 뚜렷하게 묻어 있었습니다. “불쌍한 내 딸, 엄마가 너무 미안하구나.” 그 순간에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그 말 뿐이었습니다. 수술하고 일주일 뒤에 퇴원하고 실밥을 뽑고 나서 기계를 착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거부감과 기계 소음 때문에 딸이 많이 힘들었고 짜증을 내고 소리를 많이 질렀습니다. 딸이 기계에 적응하도록 많이 노력했고, 구화학교 선생님들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딸은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희망의 소리를 듣다. "엄마"

  말을 배우기 위해서 남구에 있는 부산특수구화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통학버스를 1시간 30분이나 타야 했습니다. 겨우 3살 밖에 안 되는데 아침마다 혼자서 버스를 탔지만 울지 않고 씩씩하게 버스를 타는 채은이의 모습이 기특하고 미안하기만 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등하교할 때 엄마와 같이 등하교하는데, 우리 채은이만 혼자서 등하교를 했습니다. 채은이한테 너무 미안하지만, 넉넉하지 못한 형편 때문에 저와 남편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사물의 소리와 사람의 소리를 구별하고, 동물의 소리, 그 다음에 언어를 배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작은 딸이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엄마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무려 4년 동안 노력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너무 감동했고 감격스러워서 계속 눈물이 나왔습니다. 고생 끝에 보람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 엄마들에게 정보를 얻어서 사랑의 달팽이라는 재단을 알게 되었습니다.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수술비용을 후원해주는 재단입니다. 채은이의 왼쪽 귀 수술비용을 후원해 달라는 부탁 글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일주일 뒤에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습니다. 채은이 수술비용을 후원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아이를 낳고 살 수 있는 것에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왼쪽 귀 수술도 잘 끝났고, 양쪽 귀에 기계를 끼니까 소리도 잘 들리고 말도 점점 늘어갔습니다.


 또 다른 시작 

  지난 3월에는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아직까지 또래보다 언어능력과 이해력이 부족해서 통합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국어와 수학을 빼고 나머지는 일반 반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뒤에 딸이 저한테 물었습니다. “엄마, 나 수술해주면 안 돼?” 왜 갑자기 수술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서 채은이는 말했습니다. “아니 수술하면 기계 안 껴도 되잖아.” 학교에서 친구들이 놀리는지 물으니까, “다른 친구들 아무 것도 기계 안 끼는데, 언니도 안 끼고, 왜 나만 껴야 되는데?”라고 말하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딸이 하는 말이 제 심장 속을 파고들었습니다. 아이 앞에서 울면 안 되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채은이가 너무 가여웠습니다. 제 품에 안고, “채은아, 한국에서는 기술이 계속 발달되어서, 채은이가 좀 더 크면 기계 없이도 채은이가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아빠, 엄마, 언니가 네 곁에 있잖아, 울지 마.”라며 달랬습니다. 채은이는 알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날 이후 기계 끼는 문제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 어린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다행히 학교생활은 재미있다고 합니다. 저번에 학교에서 그림 그리기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인 채은이가 장려상을 받았습니다. 작은 상이었지만, 아이가 많이 행복해보였습니다. 커서 채은이의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부유하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예쁜 딸들이 제 곁에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제 삶은 만족스럽습니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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